조화로운 삶으로의 전환 _ 발표자료

4/22 <조화로운 삶으로의 전환> _ 발표자료

1. 시작하며

‘자연농’은 1950년대 일본의 농학자 후쿠오카 마사노부에 의해 처음 창안된, 자연을 따르는 농사입니다. 땅을 갈지 않고 약을 치지 않고 비료를 주지 않으며 벌레와 풀을 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넓게는 농사뿐 아니라 삶의 방식을 뜻하기도 합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 이후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보다 쉽게, 실용적으로 다듬었고, 차츰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현재 ‘아카메 자연농 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자연농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제작한 다큐 ‘자연농(Final Straw)’은 2011년 시작하여 2015년 가을 완성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최소인원 3명에서 최대인원 200명까지, 가정집에서 예술회관까지, 크고 작은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재작년 가을 겨울 동안 한국에서 약 70회, 작년 봄 여름에는 일본 전역에서 약 50회 정도의 상영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다큐 제작 시 통역 및 진행을 도와주었던 일본인 친구 카오리 츠지 씨가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상영회를 조직했습니다. 2년간 자연농을 실습한 학생이자 마크로비오틱 요리사, 마사지 테라피스트로 활동하면서 생태, 건강, 대안적인 삶 분야에 두루 발을 걸치고 있던 카오리 덕분에,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두루 상영회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일본 내 상영회들을 통해 만난, 조화로운 삶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합니다.

2.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은 근대화 -> 경제성장 ->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수십 년 먼저 겪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본격적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담은 ‘자연농’은 귀농귀촌, 소박한 삶, 자립하는 삶, 건강한 식생활, 자연의학, 자연출산 등등 다양한 갈래의 대안을 찾는 움직임 중 하나로 널리 받아들여지며 차차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큐 ‘자연농’의 상영회는 도시와 시골을 두루 돌아다니며 열렸습니다. 도시에서는 주로 직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른 길을 찾고 있는, 혹은 준비하고 있는 젊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시골에서는 이미 삶의 전환을 감행하여 떠나온, 생업을 그만두고서 다른 길을 개척해가고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널리 소개하고픈, 영감을 주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 도쿠시마의 예술가 농부, 타카바 신지
신지 씨는 홋카이도 출신 전직 건축가입니다. 지금은 도쿠시마 아난 시에서 자연농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신지 씨를 처음 만난 건 2015년 여름, 작은 무인도 나루가시마에서 열린 ‘하마보 축제’에서였습니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 아와지시마 남동쪽에 있는 무인도 ‘나루가시마’는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식물들, 새들과 바다거북이 모여드는 작은 섬입니다. 이 섬의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1989년부터 ‘나루가시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지역모임에서 ‘하마보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줍고, 함께 춤추며 놀고, 지역 농부들이 기증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무료로 나누며, 아름다운 섬을 함께 즐깁니다. 이날 축제 후 나오는 배를 함께 탄 신지 씨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지요. 도쿠시마에서 자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개를 듣고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자연농 다큐를 만들고 있으니, 다큐가 완성되면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요. 이후 2016년 4월 신지 씨의 도움으로 ‘뵤도지’라는 사찰에서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신지 씨는 접수와 진행을 맡아 부지런히 도움을 주었습니다. 상영회 후에는 신지 씨의 집에서 저녁 모임이 열렸습니다. 아내분과 친구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저희는 집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낡은 집을 저렴하게 구했다고, 손볼 곳이 많았지만 직접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며 신지 씨가 웃었습니다. 집 옆의 밭, 나무그네, 뒤쪽의 대나무숲, 모두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실내가 어두워 사진으로 담지는 못했지만, 집 역시 구석구석 닿은 손길이 느껴지는 참 아늑한 공간이었습니다.
식사 후에는 신지 씨가 책 몇 권을 들고 나와 보여주었습니다.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데, 제본을 배워서 책도 직접 만든다고 했습니다. 프린터기로 인쇄한 후 종이를 붙여가며 손으로 직접 만든 책은 만듦새가 아주 좋았습니다.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섬세한 그림과 고운 글씨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권 사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은 재고가 없고, 만드는 데 몇 주 걸리는데 괜찮겠냐고 물어왔지요. 값을 치르고 주소를 적어 쪽지를 두고 왔더니, 몇 주 후 그 책자와 직접 볶았다는 커피가 도착했습니다.
신지 씨는 “자연에 깃들어 농사를 짓다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절로 예술가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손으로 직접,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가고 있는 신지 씨 덕분에 자연으로부터, 절로 빚어져 나온 아름다운 예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신성한 자연을 섬기는 농부, 나카노 신고
신고 씨는 고베 시 외곽에서 자연농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농부입니다. 매달 아카메 자연농학교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신고 씨의 ‘아침이슬농장’에서도 작은 자연농 공부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산과 바다를 두루 끼고 있는 고베 시는 지자체에서 적극적인 로컬푸드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신고 씨는 농부의 시장 같은 직거래 로컬푸드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회원제 꾸러미 운영, 페이스북 등 온라인 공간을 통한 홍보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작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 덕분인지 신고 씨의 채소는 늘 인기가 높습니다. 제가 찾아갔던 농부의 시장에서도 트럭이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되기 전, 신고 씨는 사진가로 일했습니다. 광고 등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하며 차차 그 길이 맞는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늘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사진 작업에 ‘과연 괜찮을까?’라는 걱정과 의문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고베 대지진을 계기로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고, 자연스럽게 농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처음 자연농을 접하던 때부터 신고 씨는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고, 자연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길. 신고 씨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참여해온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철학과도 바로 맞닿아 있어서 더욱 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고 씨의 차에는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신고 씨는 농사라는 생계수단을 통해, 그리고 다방면으로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통해, 이러한 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_ 시애틀 추장의 편지

* 꿀벌 같은 채소가게, ‘츠타에비토’
‘일상 속 작은 행복을 늘릴 수 있는, 맛있는 감동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소개글처럼, 채소가게 츠타에비토(つたえびと,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는 행복과 감동을 전달하는 움직이는 채소가게입니다. 5년 전 이 사업을 시작한 사노 씨는 원래 귀농 후 소규모 농사를 지었지만, 유통경로가 마땅치 않다는 고민을 계속 이어가다, 농사 대신 채소 가게를 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막상 시작해보니 이 일이 더 즐겁고, 자기 적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아서 쭉 즐겁게 이어가고 있다네요.
‘전하는 사람’이라는 이름 그대로, 사노 씨의 일은 단순합니다. 월~금 아침마다 오사카 인근의 소규모 농가들을 찾아가 판매할 농산물들을 구입한 다음, 오후에는 시내 곳곳의 정해진 장소들에 트럭을 세워놓고 채소들을 판매합니다. 저희가 찾아갔던 때도 계속해서 단골손님들이 찾아왔고, 채소들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며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와, 꼭 꿀벌 같네요. 농민과 도시인을 이어주고, 양쪽 모두에게 꼭 필요한데다, 생태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꿀벌요.” 라고 했더니 사노 씨가 무척 기뻐했습니다. 농부들은 정기적으로, 적절한 값에 농산물들을 판매할 수 있어서 좋고, 도시 사람들도 품질 좋고 신선한 농산물들을 거품 없이 구입할 수 있어서 좋고, 이 일을 하는 사노 씨는 스스로 즐겁고 행복한데다 생계를 이어갈 수 있어서 좋고, 작지만 요모조모 참 알찬 채소가게입니다. 참고로 작년에 나온 ‘여행하는 채소가게’라는 책에도, 소비자와 농부를 잇는 채널 겸 자연의 흐름까지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은 채소가게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 아카메 자연농학교 & 자연농의 큰 스승, 가와구치 요시카즈님
나라 현과 미에 현 경계에 있는 ‘아카메 자연농학교’는 1991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자연농의 메카입니다. 매달 한 번씩 계절의 흐름에 맞는 농사일들을 설명하는 견학회가 열리고, 원하는 누구나 자연농을 직접 실습할 수 있도록 무료로 땅을 빌려줍니다. 저는 2015년 8월, 홍성자연재배협동조합 분들과 함께 토요일 사전모임과 일요일 견학회에 참석했습니다. 꽤 큰 규모의 실습농장이 자율적으로 운영된다는 것, 기부금을 바탕으로 전액 무료로 진행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모인 사람들 모두가 너무도 행복하게, 환하게 웃는다는 점이 정말로 인상 깊었습니다. 스태프 한 분이 농장 구석구석을 함께 다니며 설명해주셨고, 저는 엄마 일손을 도우러 온 두 꼬마 친구들과 친해져서, 그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사진을 담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자연농을 배운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져, 그 지역에서 자연농 모임, 실습 농장을 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300명 넘는 인파로 붐볐던 정기 견학회는 현재 매회 200명 안팎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아카메 학생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매달 교육 내용, 전국 자연농 네트워크 등 여러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http://iwazumi.sakura.ne.jp/

한편, 처음 아카메 자연농학교를 연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신비한 밭에 서서’ 등의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자연농의 대가입니다. 몇 년 전 건강 문제로 아카메 자연농학교 대표에서는 물러나셨지만, 나라 현 사쿠라이 시 외곽에 있는 자신의 논밭에서 다시 자연농 모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봄, 상영회가 한창 이어지던 중에 짬을 내어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오랜 세월 자연농을 이어오신 가와구치 님의 논밭에서는, 그저 가만히 그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받는 기분이 듭니다. 일본어로만 진행되는 설명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온 삶을 자연농과 함께 해 오신 큰 스승님과 그 분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화로운 삶’을 위한 커다란 흐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움직이고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일본 상영회에서 담아온 소감, 후기들입니다.

“지금 이 사회는 너무도 자연과 반대로 대립하고 있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감각이 자연스레 무뎌지는데, 이런 자리를 통해 다시 진실을 깨닫게 된다.” _ 나고야

“원래 컴퓨터 회사에서 일했지만 몸이 많이 아팠고 결국 직업을 바꾸었다. 지금 이 사회는 너무나도 ‘자동화’되어 있어서 ‘사람’을 느낄 여지가 없다. 뭔가를 사먹을 때, 얼마나 많은 손길이 닿았을까 생각하면서 최대한 더 자연스러운 음식을 찾아 먹으려 한다.” _ 오키나와

“자연출산으로 아이를 낳았다. 다큐를 보면서 자연농과 자연출산이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그 안에 속해있다는 점이 그렇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내 안의 많은 감정들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된다.” _ 고베

“후쿠시마 사고 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계속해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다. 다큐를 보면서 느낀 점은, 만약 작은 벌레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차마 핵발전소를 지을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거라는 점이다.” _ 홋카이도

“우리는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더 단순하게, 작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동안 품어온 내 생각이 옳았다는 걸 재확인하는 느낌이었다.” _ 홋카이도

이렇듯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차차 폭넓게,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는 일본에서, 희망을 품게 하는 작은 새싹들, 이미 가지를 뻗으며 쑥쑥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평화운동가 마사키 다카시 선생님의 말씀으로 제 이야기를 마칩니다. “유한의 지구 위에서, 무한의 경제개발은 불가능하므로, 현대문명이라는 열차는 절벽을 만날 수밖에 없다. (…) 문명이 무너져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너지지 않고 남아서, 새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