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시민들의 즐거운 반상회

올해 초, 일본에서 5월 말에 열린다는 특별한 행사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생명, 평화, 공동체 등을 주제로 다른 삶을 꿈꾸는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고 했습니다. 준비팀으로 참여하고 있던 친구 오하이오, 그리고 부산 온배움터의 이정호님을 통해 다큐 ‘자연농’ 상영회와 만다라 워크숍 계획을 차근차근 잡아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열린 ‘동아시아 지구시민촌’에 다녀왔습니다.

올해로 4번째. 그동안 3번은 쭉 중국에서 열렸고 일본에서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첫 시작을 알리는 자리에서부터 ‘주최자, 진행자, 참가자 구분 없이 모두 자발적으로 주인이 되어 참여하는 행사’라는 걸 거듭 강조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느슨한 운영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데다, 일본어와 중국어와 한국어가 오가는 중에 (셋 다 못 알아듣는 패트릭에게) 영어로 번역까지 하느라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직접 겪어가며 차차 적응이 되어갔습니다. 비유하자면 주방에서 이미 다 완성된 메뉴를 손님으로서 그저 음미하는 게 아니라, ‘지구시민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곳에 모인 지구촌 시민들이 와글와글 수다를 떨고 어울리며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자리였던 겁니다.

첫날 오후 열렸던 ‘10분 프리젠테이션’이 특히 그랬습니다. 넓은 강당 안에 총 다섯 군데로 나뉘어서, 각각 다른 주제로 다섯 차례씩, 그러니까 총 스물다섯 개의 10분짜리 발표들이 활기차게 이어졌습니다. 시간표를 보면서 각자 관심 가는 부스를 찾아가면 되는데, 만약 언어 문제가 있다면 통역이 가능한 스태프나 참가자를 찾아 직접 부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누군가 내게 가르쳐주기를 기대하면 안 되고, 직접 움직이며 관심 가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귀를 쫑긋 세워야 했습니다. 맨 처음 미처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어영부영 헤매다 놓친 아까운 발표들도 몇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 사이에서 건져온 이야기들도 많았습니다. 아쉬움도 조금 남았지만, 놓쳐버린 것보다는 손 안에 들어온 보물을 소중히 여기며 그 인연에 집중하자고 다시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는 배움도 얻었습니다.

그렇게 담아온 ‘보물’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후지노 인근 다카오산에서 생태다양성 가이드로 일하는 마사코 씨의 발표였습니다. 그저 식물 이름 알려주기에만 그치지 않고, 각각 생명체에 담긴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주면 사람들이 더 오래 기억하고 마음에 더 잘 가닿게 된다는 첫 대목부터 확 와 닿았습니다. 이를테면, 산 속 샘물을 맛보면서, 한 번 흡수된 빗물은 15년 동안 산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돌아다니다 마침내 샘물로 솟아난다는, 그러므로 이 샘물은 15년 전의 빗물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단순한 한 모금이 아닌, 15년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확 실감나면서 더 생생하게 그 물맛을 체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가이드와 함께라면 얼마나 산행이 알차고 즐거울까, 상상해보았습니다. 실제로 이분의 이야기에 크게 감동한 한국인 참가자 산하님은 일정을 바꾸어, 며칠 후 열리는 이분의 가이드에 동행했습니다.

둘째 날 오후에는 저희가 진행하는 다큐 ‘자연농’ 상영회와 만다라 워크숍이 열렸습니다. 워크숍 준비를 위해 저희는 아침부터 행사장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먼저 언덕 가운데 자그마한 나무 아래, 만다라를 만들 위치부터 정한 다음 재료가 될 자연물을 찾아나섰습니다.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재료의 종류도 빛깔도 완전히 바뀌어서 늘 만다라 워크숍을 열 때마다 새롭고 또 흥미롭습니다. 한창 초록빛이 푸른 5월 말에는 적당한 재료를 찾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쪽 공터에서 가지치기 후 쌓여 있던 갈색 나뭇가지, 일찌감치 노랗게 물든 나뭇잎, 막 떨어진 하얀 꽃송이들을 두루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모아담은 재료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일단 실내 회의실에 모여 다큐 ‘자연농’의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상영회, 그리고 질문 답변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모두 밖으로 이동해서 만다라 워크숍을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되도록 ‘너무 머리로 판단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이 하는 작업에 대해 옳다 그르다 평가하지 말 것, 마음 가는 대로 온전히 맡겨가며 편안하게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만다라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쭉 돌아가면서 서로의 소감을 나누었는데, ‘어린 시절 아무런 생각 없이 신나게 노닐던 때처럼 편안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땐 그저 흔한 잎사귀였는데, 정성껏 만다라를 그리며 완전히 새롭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같은 후기를 들었습니다. 자연의 선물을 온전히 선물로 누리며,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소중한 선물 같은 시간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게 기뻤습니다.

이렇게 첫째 날과 둘째 날을 보낸 후 마지막 날,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람과도 사흘째 계속 마주치며 얼굴을 대하다보니 몹시 친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이웃처럼, 가족처럼 다정하게 느껴졌지요. 오전 프로그램은 브레인스토밍처럼 자발적으로 주제를 정한 다음, 군데군데 흩어져 활기찬 수다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액티브 호프’라는 이름의 워크샵, 어떻게 마음의 변화부터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과 함께, 각자의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환경교육 활동가는, 많은 이들이 환경이라는 주제를 상업적으로만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걱정을 털어놓았고, 또 다른 활동가는 밖으로는 뜻 깊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안으로는 그저 지쳐버리는 것만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따로 또 같이, 저마다의 사연은 조금씩 다르지만, 고민하고 걱정하고 돌파해나가면서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 서로 힘을 북돋고 응원하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오후, 전체 행사를 닫는 자리에선 각 나라별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소감을 나눴습니다. 한 명뿐인 미국인이었던 패트릭이 첫 순서였습니다. “비슷한 고민거리들을 안고, 같은 꿈을 꾸면서,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몫을 해나가고 있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모두를 꼭 안아주고 싶다” 는 소감을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 덕분에 눈길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서로를 자연스레 안아주게 되었지요. 이어서, 각 나라의 음악가들이 함께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참가자들 모두가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손을 잡고 감동을 나누었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는 낯익은 얼굴들을 눈에 담으면서, 그저 낯설고 어색하기만 느껴졌던 첫날 첫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불과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졌음을 느꼈습니다. 얼핏 어렵게만 느껴지는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큰 주제 역시 이렇게 풀어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어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 속 벽을 허물고, 서로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국적도 언어도 저마다 처한 입장도 다 다르지만,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저희가 ‘동아시아 지구시민촌’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입니다.

첫날 오후 ’10분 프리젠테이션’ 풍경

둘째날 오전, 다양한 워크샵들이 곳곳에서 진행되던 잔디밭에서
곳곳을 다니며 부지런히 재료들을 모아왔습니다. 부러진 나뭇가지, 떨어진 꽃잎, 나뭇잎..
호기심 많은 꼬마 친구가 열심히 재료들을 담아오면서 우릴 거들어주었고요.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세워놓은 작은 안내판

‘만다라 워크샵’ 참가자분들과 함께 🙂

점심시간 바깥에서 담은 사진, 국적도 나이도 쓰는 언어도 다 다르지만 모두가 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