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승, 가와구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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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나라현 사쿠라이의 가와구치 요시카즈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지혜롭고 따스한 큰 스승님을 뵙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응원과 격려를 듬뿍 받고서 돌아왔습니다. 2012년 봄 다큐 ‘자연농’ 취재 때, 저는 다른 일로 가지 못하고 패트릭만 다녀오는 바람에 그동안 쭉 책과 영상으로만 접해왔을 뿐 실제로 만나뵙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조금은 긴장도 되고 떨렸는데, 참 웃음이 많고 정다우신 할아버지셔서 금세 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준비해간 다큐 DVD를 드리면서, 처음 찾아뵈었던 게 3년 전인데 참 오래 걸렸다고 말씀드렸더니,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다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취재를 해갔는데, 어떤 분은 10년 넘도록 꾸준히 찾아와 촬영해갔는데도 아직 끝마치지 못하고 있다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참 수고 많았어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보니, 지나온 길이 떠올랐습니다. 막막하던 때도 있었고, 자신없던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 혼자였더라면 결코 오지 못했을 길, 든든한 동반자와 함께여서, 그리고 크고 작은 도움들을 주고 지지해주는 고마운 이들과 함께여서 정말 다행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날따라 마침 태풍이 왔습니다. 바깥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였지만, 단정하고 소박한 서재 안은 아늑하고 차분해서 마치 다른 세계 같았습니다. 가와구치님은 느릿느릿 말씀을 이어가셨고 카오리가 열심히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한 마디도 놓치기 아쉬운 마음에 수첩을 꺼내놓고 틈틈이 옮겨적었습니다.

“30년 전 내가 처음 책을 냈을 땐, 아무런 반응도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책을 냈던 것, 그리고 여러분이 이렇게 다큐를 만드는 것, 모두가 씨앗을 뿌리는 일 같아요. 일단 뿌리고 나면, 적당한 때와 장소를 찾으면 자연스럽게 싹이 트지요. 그때에 비해서 지금은 자연농이 점점 더 알려지고 있고, 조금씩 자연농을 하는 이들도 늘고 있어요. 이 다큐도 좋은 역할을 하게 된다면 좋겠네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오랜 시간 어려운 길을 헤쳐오셨는데, 거기에 비해서 저희는 훨씬 더 쉬운 역할을 맡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괜찮아요 괜찮아” 하며 허허 웃으셨지요. 그리고 인쇄물을 하나씩 나눠주셨는데, 최근 시작하셨다는 자연농 경험담을 모으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안내문이었습니다.

“자연농의 지혜는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보물이지요. 내가 겪었던 경험들을 널리 나눠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어요. 뒤따라오는 이들이 그 경험을 잘 참고할 수 있도록 해서, 좀 더 수월하게 자연농을 할 수 있다면 좋을테니까, 그래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됐어요.” 자연농을 하며 겪는 어려움들을 포함한 모든 농사기록들을 공유하는 이 사이트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다큐 시작 초반에, 다큐 완성 이후의 길을 고민하면서 저희도 떠올렸던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작년엔 건강 문제로 고생하셨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필요한 일들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고 계신 모습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져 왔습니다.

“사람이 온삶을 통해 참된 진실을 추구한다면, 점차 그 진실에 가까워지게 되고, 그 진실로부터 에너지를 얻게 되며 결코 지루해지지 않지요. 하지만 진실이 아닌 것을 추구한다면 쉽게 지루해지고 또 길을 잃게 됩니다.” 책 <신비한 밭에 서서>에서도 강조하시는 ‘진실’, 자연의 섭리, 그리고 신의 뜻을 따르는 일. 사람들마다 방법과 수단은 모두 다르더라도, 본바탕에 자리한 목적은 꼭 같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지금 눈앞에 계신 가와구치 선생님은 농사와 교육이라는 방법을 통해 쭉 진실을 추구해오셨고, 그리고 우리는 이 다큐를 통해,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도 또 무엇이 될진 모르겠지만 다양한 길을 통해서, 그 진실을 널리 알리고 퍼뜨리는 데 힘써야겠구나, 그게 나의 몫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디 선생님이 그래오신 것처럼,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꾸준히 참된 진실을 잊지 않고 마음 속에 늘 간직하며 나만의 길을 잘 걸어나갈 수 있길. 자연의 신께,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부탁했습니다.

두어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선생님 제자이신 마키 님의 소개로 집 근처 논과 밭을 둘러보았습니다. 언젠가 최성현 선생님 글에서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았고, 모두가 감격했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그랬습니다. 거친 태풍 속에서도 꽃과 나무들에 둘러싸인 안쪽 밭은 그 자체로 포근한 낙원이었습니다. 맛보라고 떼어주신 토마토는 얼마나 달콤했는지. 꽃을 좋아해서 곳곳에 심었다고 하셨는데, 커다란 무궁화나무가 특히 아름다웠습니다. 역에서 가까운 다른 밭은 일본 고대유적인 히미코 궁궐터로 밝혀져서 곧 그 밭을 정부에 넘겨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밭에서 자란, 어른 종아리보다 더 기다란 애호박을 보며 ‘와, 대단하네요’ 하며 놀라워했는데, 기념이라며 선물로 주셨습니다.

밭을 둘러보는 동안 집에 계셨던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작년엔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었는데, 다행히 잘 회복이 되어서 요즘엔 농사일도 꾸준히 하시고, 가끔 도시로 외출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열차가 도착했고,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고서 차에 올라탔습니다. 열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멀리 저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온삶을 통해 진실을 추구해오신 큰 스승님이 저기 계시고, 저희를 힘껏 응원해주시고, 기운을 북돋아주시는구나, 참 좋은 스승들이 내 삶엔 이토록 많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진실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가야겠구나, 하고 다짐하며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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